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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삶/국내여행

특별 선원 / 가은 봉암사

낭만할매 안단테 2024. 5. 14. 16:19



실로 50년 만에 가보는 사찰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 있는
조계종 특별선원 봉암사이다.


예전에는 산문이 열렸던 곳이라
기차 타고 기숙사 학생들을 이끌고
여 선생님 두 분이 함께 가셨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가은 역에
내려서 봉암사까지 계속 걸어갔는지
버스를 타고 근처까지 갔는지
통 기억이 없고 '선생님, 아직 멀었어요?'
물어본 것과 ''조금만
가면 된다''는 대답만 듣고
무작정 걸었던 기억, 사복 입으면
안 되고 교복 입어야 했다.
사진을 보니 나도 내가 어디 있는지
한참 들여다 본 후에야 찾았다


지금 생각해도 가은역과 봉암사는
5 km 이상은 될 듯하다.
논과 논 사이 길을 걸어가는데
6월의 태양은 더웠다.
높은 산만 생각날 뿐인 곳이다.

~~~~~~~~~~^^


1984년부터 조계종 특별선원으로 정하고 일 년 중 부처님 오신 날만 개방하는 곳인데 올해는 어쩌다 전화를 해보니 일주일간 개방한다고 하니 내일 당장 가보자고 하면서
'부처님 오신 날'을 피해 다녀왔다.
 
 

 
봉암사는 삼층석탑(보물 169호)과
지증대사 적조탑(보물 137호)과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138) 등
국보급 보물이 많이 있다. 

이밖에도 정진대사 원오탑과
정진대사 탑비가 보물 171호와
172호로 지정되었다. 
 
산문에 들어서니 공양간 앞에 신도들이 줄을 서 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점심시간이
좀 이르다. 모두 연등값을 냈으니
밥은 먹어도 된다고 한다.
연등값은 입장료다. 소원하는 일을
적어라고 해서 세가지나 적었다.

상추겉절이와 취나물 무침,
깍두기 몇 알, 머위 잎 무침과
맛된장 조금으로 밥을 비벼 먹거나 그냥 먹으면 되는데
남편은 비비고 나는 그냥 먹었다.

된장이 특이하면서 짜지 않고 맛났다.
어떻게 그 맛을 냈을까 궁금하다.
 
사찰 음식은 정말 오랜만이다. 2018년 월정사 앞에서
먹은 후 처음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선(智詵:智證國師)이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지선은 희양산 중턱의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선궁(禪宮)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선사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선가(禪家)의 토착화를 위한 한 방편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가 1431년(세종 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년(현종 15) 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信和)가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 불전과 승려가 불탔으나 바로 중건하였다. 1915년에는 세욱(世煜)이 다시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碑閣)과 익랑(翼廊)을 세웠다.]/다음 검색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앞면 1칸, 옆면 1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겹처마의 사모지붕이다. 희양산(曦陽山) 기슭에 자리 잡은 봉암사는 879년(헌강왕 5)에 창건된 뒤, 935년(태조 18)에 다시 고쳐 지었는데, 임진왜란 등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자주 불탔지만, 극락전은 일주문과 함께 불타지 않았다고 전한다. 특히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하였을 때 원당(願堂)으로 사용하였기에, 현재에도 건물 안에 ‘어필각(御筆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다음백과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珠)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禪院)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과는 달리 편액을 걸고 있지 않다.]/다음검색

극락전

 

 

뒷편에는 대웅전 앞에는 금색단이라고 씌어있다.
지증대사 사리부도전
조사전

 

삼층석탑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6.31m. 석탑은 단층 받침돌 위에 탑신부(塔身部)를 두고 상륜부(相輪部)를 완전히 갖춘 모습이다. 특히 단층 받침돌은 주변 지역에 있는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 하대에 이르러 변화하였던 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석탑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있는데, 앞면과 옆면에 각각 2구와 1구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단층 받침돌의 아래에는 넓고 네모난 바닥돌인 지대석(地臺石)을 깔았다. 바닥돌 아랫부분에는 곡선을 그리는 1단의 받침이 있어, 마치 아래에 있는 어떤 구조물의 덮개돌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덮개돌로 보기는 어렵다. 바닥돌의 윗부분에는 제법 높은 굄 모습의 하대석(下臺石)이 있다. 그 위의 받침돌의 면석은 4장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이 각각 새겨져 있다. 면석 위의 덮개돌에는 밑면에 쇠시리인 부연(副椽)을 얇게 나타내었고, 윗면에는 둥글고 각진 굄 장식을 두어 위의 몸돌을 받치게 하였다.]

 

[높이 6.0m, 너비 4.5m. 202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5년 3월에 조사된 이 불상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좌상으로서 백운대(白雲臺)라고도 불리는 옥석대(玉石臺)의 북벽에 만들어진 감실(龕室) 모양 안에 양각되어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나지막한 육계(肉髻)에 계주(髻珠)가 뚜렷하다. 비교적 큰 귀가 달려 있는 갸름한 얼굴에는 우뚝한 코와 치켜진 가느다란 눈, 꾹 다문 입 등이 잘 조화되어 있으며, 양 눈썹 사이에는 백회공(白毫孔)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고 통견(通肩)의 법의(法衣)에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뚜렷한 옷주름선은 유려하다. 두 손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한줄기의 연꽃가지를 잡고 있는데, 이러한 손모양은 동화사염불암마애보살좌상(桐華寺念佛庵磨崖菩薩坐像)과 거의 같아 주목된다.
손 밑에 드러난 발은 두 손과 더불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대좌는 단판연화좌(單瓣蓮花座)로서 마멸이 심하다.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된 여말선초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불상은 고려 말 조선 초기 마애불상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다음백과

마애불상에서 봉암사로 내려 오는 길에 만난 야생 으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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