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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삶/국내여행

청령포/영월장릉

낭만할매 안단테 2024. 6. 2. 19:40

남쪽은 기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 · 북 · 서쪽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수한 지형이다. 또한 이곳은 1457년(세조 3) 세조(世祖)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된 단종의 유배지로, 그 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기기 전까지 단종이 머물던 곳이다./다음백과

청령포

관음송


영월에서 유배생활을 한 단종은 소나무가 갈라진 사이에 걸터앉아서 지낸 때가 많았다고 한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가 23.3m, 남북이 20m이며, 평균 21.7m 정도로서 지상 12.5m에서 가지가 갈라져서 학의 날개처럼 퍼졌다. 나무의 나이는 600년 정도로 보고 있는데, 단종 유배 시의 수령을 80년 정도로 보고 계산한 것이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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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으로 가는 길 파란 하늘.
이제는 박 또비여사를 벗어났다

장릉

단종의 장릉은 조선왕조 재위 임금 중에서는 유일하게 수도권이 아닌 곳에 있는 능이다. 이는 아래의 복잡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부인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단종이 영월에서 죽게 되고 시신이 영월 동강에 버려지면서 지역 호장(戶長)인 엄흥도가 동강에서 그의 시신을 운구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暗葬)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슬 퍼런 세조의 눈을 피해 암장했던 만큼 단종의 무덤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 후 1541년 중종 때, 노산군의 무덤을 찾으라는 명을 받고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영월군수 박충원이 발견하여 묘소를 정비하게 되었고, 1580년 주변에 비석들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이 당시까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상태여서 묘(墓)라는 칭호를 유지해 왔다가 1698년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킴에 따라 무덤도 능으로 격상되고 장릉이라 이름하였다. 이때, 단종의 시신을 모셨던 엄흥도에게는 공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왕릉 공사를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였던 것을 감안한 셈.
/위키백과


80년 역사를 지닌 장릉 옆
장릉 보리밥집에서 그 또한 30년 만에 그 집 보리밥을 먹었다.

그 집은 보리밥에 감자를 넣어
더 구수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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