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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또 책을 한 보따리
빌려 오면서 재봉에만 매달린 나에게
책 좀 보고 공부 좀 하라는 남편.
겸재 정선의 화첩이랑 겸재 정선
그림 동화책을 식탁에 쌓아 놓는다.
식사 당번은 내가 하고 설거지는
남편이 하는 시간에 잠시 앉아
들여다 본 겸재 정선의 화첩이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 15만 점 이상이
외국 수많은 나라로 유출되었다고
한다. 그중 겸재 정선화첩이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되었다가 선지훈 신부님의
노력으로 경북 왜관 수도원으로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화가로서 진경산수화가 대대적으로 유행하는 계기를 만든 선구적인 인물이다.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본관은 광주(光州)로서 1676년 1월 3일 한성 북부 순화방 1)에서 유학 정시익(鄭時翊)과 진사 박자진(朴自振)의 딸인 밀양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선의 직계는 증조부 때부터 3대에 걸쳐 사마시도 나가지 못한 채 급격히 쇠락했다. 14세 되던 1689년에 부친이 사망하고 기사환국으로 정국이 급변해 남인이 집권하며 노론마저 실각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8살짜리 동생까지 거느린 소년 가장이 되어 더욱 불우한 처지가 되었다.
정선은 이웃에 살던 외가의 도움으로 낙향을 면한 채 겨우 서울 생활을 유지했지만, 간혹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에 직면하게 되자 학업에 전념하기 어려웠던 듯 사마시도 나가지 못한 채 일찍이 화도(畵道)에 입문하며 묵객의 길을 걸었다.
30대 중반에는 기량이 제법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듯, 36세 되던 1711년 경부터 특히 금강산의 진경산수화에 능한 문인화가로 이름을 떨치며 혜성처럼 등장한다.
정선은 조선 초 · 중기 이래 축적되어 온 내부적인 회화 전통 위에 명청대 이래 다양하게 전래된 국제적인 화풍까지 창조적으로 소화한 뒤, 우리의 민족적 자존의식과 국토애를 바탕으로 하여 거의 쓰고 버린 "붓이 무덤을 이룰 [埋筆成塚] 정도로 평생에 걸친 사생(寫生)과 사의(寫意) 작업을 통한 각고의 노력으로 이와 같은 놀라운 창조적 성과를 이룩함으로써 우리나라 산수화가 개벽되는 [我東山水之畵 盖自元伯始開闢矣]"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
황제가 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량에 대한 그림이라고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를 취해서
그림의 절반 이상이 파도가 넘실대는 강물에서 앞에 앉은 사공은 거친 파도
바위에 부딪히지 않도록 젓대로 절벽을 밀고 있다.
버드나무가 늘어진 여름날 거룻배에
앉아 낚시하는 장면이다. 남자는 배 앞쪽에 기다란 낚시를 드리운 채
먼 하늘만 바라보고 뒤에는 학 한 마리가 고개를 빼 들고 울고 있다.
선실에는 부인과 아이가 살짝 보인다.
소를 탄 아이가 피리를 불며 길을
가는 그림이다. 소의 생김새로 보면
우리나라 소가 아닌 중국 강남지방의
물소이다.
내금강의 명소 만폭동 일대의
경관을 조망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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